겨울의 문전에서 열어놓은 창으로 구슬 굴러가듯 맑은 벌레 울음소리를 나는 사랑합니다.
티하나 없이 맑고 깨끗한 옥으로 빚어 놓은 구슬이 귓전에 스치며 지나가는 듯한
그 음향에 나는 문득 넋을 잃고 귀 기울이게 됩니다.
온갖 시끄러운 소리로 가득 차있던 한 나절이 지나면 하루의 고달픈 일과를 씻어주는 아름다운 자연의 음향을 남겨주신 하나님께 나는 감사를 드리게 됩니다.
벌레 울음소리 그윽한 밤에 잠도 잊어가며 넘기는 책장의 소리를 나는 사랑합니다.
때로는 오묘한 진리를, 달콤한 물결을 또는 지혜의 가교를 건너며 서서히
그리고 차곡차곡 나의 가슴을 살찌워가는 일이 얼마나 즐겁고 보람찬 일인지 모릅니다.
그런 밤은 졸음도 나를 침범할 수 없습니다. 책 읽는 밤은 차가운 형광등 보다는 다사롭고
포근한 백열등이 더욱 정겹습니다. 책갈피 속에는 신비로운 향기가 깃들어 있습니다.
그 향기는 사람을 울리기도 웃기기도, 흥분하게 하기도 손에 땀을 쥐게 하기도 합니다.
황홀한 시익 물결을 타며 문득 이렇게 아름다운 우리에게 물려주신 옛 어른들께 감사드립니다.
좀 더 우리글을 아름답게 갈고 닦음으로써 보답하겠다고 다짐해 봅니다.
나는 병과 좌절과 상처받은 마음과 항상 근심하고 매일 긴장하며 나의 병은 완치가 안 된다는
생각으로 예수님의 능력을 무시했다.
좌절하고 용기가 꺾여서 다른 사람이 나의 아픈 모습을 보면 안 될 텐 데라는 생각 때문에
나의 아픈 모습을 보고 사람들이 비웃을까봐 그들의 놀림감이 될까봐 두려웠다.
나는 누구와도 내 감정을 나누지 않았다. 비록 내가 그리스도를 나의 구주로 믿고 있었지만
다만 내 자신을 홀로 변화시키려고 애쓰면서 그저 끈기 있게 기다리기만 했던 것이다.
나는 내 자신이 항상 불행 하다고 느꼈다. 내 자신을 회상해 볼 때 나의 문제는 아픈 내 모습 때문에 나의 자신을 숨기려하는 것이 문제였다.
문제는 내가 두려움이 나를 그렇게 하도록 허용한 것이었다.
두려움은 내가 교회에서 집사님들께서 중보기도와 여러 가지 도와주겠다는 요청을 거절하거나 다른 사람에게 각별히 신경 써서 도와주려 할 때 또는 내가 초대를 거절할 때마다 많은 영향을 미쳤다. 나의 두려움 때문에 나의 제일 중요한 문제들을 주님께 맡기지 못했으며 주님의 길을 따라가지 못하게 했던 것이다.
내가 주님을 믿고 의지하려 할 때 마다 그 기회를 놓치는 것이 무엇보다도 나쁜 부분이었다.
몇 년이 지났고 새로운 도시와 새로운 사람들을 만났지만 나는 여전히 혼자였다.
나는 처음으로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관계를 맺게 되었다.
그러나 당신이 나의 두려움을 가져가신다는 것은 믿을 수 없습니다. 라고 말하고 있는 것과 같은 일이었다.
이러한 생각이 들 때 마다 나는 죄의식과 부끄러움에 몸 둘 바를 몰랐다.
이제 나는 홀로 나의 두려움을 없앨 수 없다는 것을 알았고 그것은 그리스도께서 나를 통해 역사 하셔야만 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나는 모든 사람이 장점뿐만 아니라 약점을 가지고 있으며 하나님은 우리의 성격을 변화시키는데
있지 않다는 것을 또한 깨달았다. 내가 스스로를 변화시키려는 노력을 하는 대선에 나 자신의 약점도 예수 그리스도께 맡겨 나의 인생에서 역사하시도록 할 때에만 변화 될 수 있다는 것이었다.
나는 1970년에 송영석 아버님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위로는 누님 한분과 여동생이 하나 있었다. 어렸을 당시에 누님을 항상 따라 다녔었다.
1974년 여름 제일 더운 낮 2시경 누님과 누님의 친구인 김윤경 누님을 따라 갔는데 4미터 높이의 언덕에서 놀고 있다가 누님의 친구인 윤경이 누님이 언덕 밑의 풀을 뜯어 오라는 소리에 나는 풀을 돋으러 가려다 4미터 높이의 언덕에서 떨어져서 병원에서 뇌수막염 인줄 알고 통용제 주사를 맞고 한동안 괜찮았지만 초등학교 1학년 때인 8살 때 처음 발작을 하게 되었고 뇌수막염 인줄 부모님께서는 알았지만 나이가 들면 들수록 더 발작이 심해지면서 좋다는 약이란 약을 계속 먹었지만 병의 차도는 전혀 없었다.
세월이 지나서 중학교 시절에는 공부를 하려고 노력을 했지만 책상에서 공부를 하다가 뒤로 넘어지는 일 까지
여러 번 있었고 시험공부도 제대로 하지 못한 상태에서 연합고사를 치렀는데 하나님 은혜로 합격하여 고등학교에 진학 할 수 있었다.
중학교 2학년 때부터 영동 세브란스 병원에서 진료를 받고 지내게 되었다
그때 그 병원에서 중학교 동창인 사이가 별로인 류철형이라는 친구를 오랜만에 만났는데
나는 환자입장에서 그리고 철형이는 의사로서 만났지만 그 순간 내 모습이 너무 초라하고 한심스러웠다.
나는 테크라툴 과페노바비탈을 복용하였다 최일생 선생님과 김원주 선생님께 처방전을 받고
여러 번 바꿔서 복용 했지만 이제는 빈 나무토막처럼 광 쓰러지는 일들이 너무 많았었다.
매일같이 상처받은 마음과 항상 근심으로 가득 찬 얼굴로 지내었다.
아버지께서는 나를 위해서 1997년 수술을 시도하려 했으나 선생님들께서는 50대50 이라는 확률을 말씀하셔서 그냥 약만 복용하며 지내게 되었다.
우연히 아버지가 TV의 SBS에서 하는 “병원기록 24시” 라는 프로그램을 시청했다.
아산병원에서 간질환자를 수술하는 장면이 나왔다. 나는 한번 아프게 되면 아픈시간은 30초에서
1분 이었지만 TV 속 환자는 하루에도 10여차례 발작을 하였고 MRI 에도 8군데나 판독 결과
확인 됐는데 수술 후에 완치기 되었다는 것을 시청했다. 아버님께서 말씀하셔서 나는 1988년 12월 12일에 TV에서 보게 된 강중구 박사님께 진료를 받지 못했으나 이상암 박사님께 아산병원에서 진료를 받고 두 번째부터 강중구 박사님께 진료를 받기 시작했다. 영동 세브란스에 계신 최일생 선생님께서는 약의 처방전 써주는 것이 많았고 상담도 많이 하시지 않았지만 강중구 박사님께서는 처음 진료 받는날 한달에 아픈날이 몇 번 이나 되니? 질문하시고 달력에 항상 표시하라고 말씀하셔서 아산병원에 다닌 이후로는 3-4개월 만에 일주일동안 안 아픈 날도 있었다. 강중구 박사님은 항상 2달에 한번 갈 때에도 아픈 날을 표시 하셨고 나를 위해서 여러 번 약도 바꿔주셨다. 박사님께서 부모님을 모셔오라고 말씀 하셔서 부모님과 병원에 갔을 때 강중구 박사님께서는 약의 성분 때문에 나의 성격이 저돌적으로 도전적으로 변한다고 말씀하셨다. 약성분 탓인지 아버님께 꾸중을 듣다가 너무 화가 나서 책상의자를 부수고 부서진 책상의자로 아버지 머리를 때리기 까지 하였다. 순간 너무 죄송스럽다는 생각 밖에는 안 들었다. 또 피곤한데 어머니께서 재활용 쓰레기를 버리고 오라고 하였는데 어머니를 밀쳐버리기 까지 하였다. 내가 내 자신을 주체를 못하고 감당을 못하였다. 그저 부모님께 죄송할 뿐 이었다. 약을 바꾸어보았지만 오히려 더 부작용이 생겨서 더 발작이 심해져서 계속 오래 복용하던 태그라톨과 폐노바비탈을 먹게 되었다. 아무리 약을 여러 번 바꿨지만 1997년에는 150번, 1998년에는 144번. 1999년에는 110번. 2000년에는 132번. 2001년에는 106번. 2002년에는 129번, 2003년에는 123번 나는 자랴오면서 남과는 말도 잘 안하고 항상 아픈 것 때문에 싸움이 생기면 그냥 참는 일이 많았는데 20대 후반에는 남들과 싸워서 주먹까지 휘둘러서 부모님께서는 못난 자식 때문에 나이가 어린 사람에게 잘못했다고 까지 말씀하신 적이 여러 번 있었다. 약만 복용하고 지내던 나에게 강중구 박사님께서 부모님을 모시고 오시라고 하셔서 모셔갔다. 박사님께서는 이제는 약으로는 불가능 하니 수술을 하시라고 말씀 하셔서 나는 약을 복용하면서 부모님들의 말씀만 기다렸다. 부모님께서는 항상 나에게 쓸데없이 돌아다니지 말아라 말씀하셨는데 무시하고 구로공단 전철역 안전선에서 쓰러져서 죽을 뻔 했었고 또 어머니와 함께 신호등을 건너다가 내가 아퍼서 어머님께서 위험하실뻔 한적도 있었다. 머리를 감다가 아퍼서 머리가 깨진일도 있었고 심지어는 자다가 침대에서 떨어져서 다친일도 여러번 있었다. 나는 아침에 조금 일찍 일어나면 그날은 꼭 아프고 조금만 긴장하면 아프고 차가운 음식을 먹어도 상황은 매일 아팠다. 부모님께서는 이번에 잠실의 4단지 아파트를 헐값에 파시면서 고생을 각오하시고 의정부로 이사를 하셨다. 2004년 병원에 입원한뒤 6일에 머리에 전극을 설치하고 7일 1인실에서 자고 13일 까지 1인실에 있었다. 14일부터 6일에서 2일 동안 지낸 뒤 20일 8시간 수술을 하게 되었다. 수술은 21일에도 10시간 동안해서 모든 수술을 마쳤다. 어머니의 동창이신 나에게는 친 이모라고 생각하는 분께서 내가 퇴원하는 한 달 가까이 아침, 점심을 항상 도시락으로 부모님의 식사를 해결 하셨다.
비좁은 병실에서 부모님은 항상 새우잠과 칼 잠을 주무셨다.
중간에 동생과 매제는 부모님들의 수고를 덜어드리려고 병원으로 출근과 퇴근을 하였고
매제는 나를 극진히 간호 했다. 확장실에서 수술 후 라서 대변이 안 나와서 고생할 때 직접 관장을 해주었고 대변이 나오게되자 매제는 나의 엉덩이가 더러운데도 휴지로 직접 닦아주어서 나는 매제에게 참다운 희생과 봉사를 다시 배울 수 있었다. 병원에서도 순간순간마다 오로지 한가지만을 기도했다. “제발 예수님의 손으로만 수술하셔서 완치시켜 주세요.” 라고 나는 생전에 내가 병이 낫는다고 직접적으로 생각한일이 없었다. 우주의 블랙홀에서 빠진 것처럼 나는 간질병을 달고 살아야만 하는 줄만 알았다. 남들은 예수님께 기도를 드려서 불치병에서도 완치 되는 사람이 있다는데 왜 나만 이렇게 간질병 때문에 고통을 받아야하나 생각 할 때 우리 교회목사님 깨서는 어떤 분은 기도를 열심히 하시고 신앙생활을 잘하셔서
7년만에 완치된 분도 있다고 말씀하시며 기도는 염치불구하고 끈질기에 하라고 말씀하셔서 기도를 하는 순간 만큼은 정말 열심히 기도를 했다.
수술을 하는 당일에도 목사님과 사모님은 새벽예배를 해야할 시간에 직접 오셔서 내가 수술을
들어가기전 까지 직접 기도를 해주시고 담대하게 행동하시라고 말씀 하셔서 용기를 내고 수술실에 들어갈 때 나는 부모님께 너무 죄를 너무나도 많이 지어서 .. , 울먹이다가 수술실에 들어갔다 수술실에 들어가서도 나는 기도를 했다. “제발 예수님의 손으로만 나의 병을 완치시켜 주세요.” 라고 예수님께 기도하였다. 나의 기나긴 질병을 놓고 기도를 열심히 드리지도 못한 것 같았는데 나의 질병이 31년이 됐지만 깨끗하게 완치시켜 주지는 못했다. 간질 이라고 하면 고칠수 없고 숨걱야할 나쁜 병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는 것이 우리 사회의 현실이다. 이같은 사회적 통념과 편견은 간질에 대한 비합리적이고 비과학적인 지식에 바탕을 두고 있는 것이다.
간질에 대한 잘못된 인식과 태도 때문에 간질환자들이 우리사회의 한구성원으로 인정 받지 못하며 지낸다. 자기의 능력을 제대로 발힘하지도 못하며 살아가는데 지장을 받게된다- 간질 환자의 부모 형제들도 근심과 고뇌속에 사실을 숨기며 살아간다 간질병은 150명에 1명의 비율로 일어나고 있다. 여러 역사적 인물 중에는 알렉산더, 줄리어스 씨저, 소크라데스, 탄테, 도스토예프스키, 헨델, 바이런, 반 고호 까지도 간질병이 있다는 명확한 자료들이 있다. 사람들이 잘못된 사회적 통념과 편견을 버리고 간질환자들을 올바른 시선으로 지켜 봐주었으면 한다. 나는 나의 간질병을 꽃에게 비유하고 싶다. 꼭 호박꽃에 비유하고 싶다. 호박꽃는 다름아닌 내 자신이라 하고 싶다. 하나님은 꽃들이 잘 자라도록 좋은 토양을 주셨고 알맞은 일조량도 주셨다 나의 부모님은 나이가 많으신 데도 못생긴 호박꽃을 하나 피우려고 나에게 항상 물을 대신하셔서 많은 가르침을 주셨다. 심지어 부모님을 때리기 까지 한 패륜아인 나를 용서하신 부모님께서는 정말 잘해드려야겠고 효도를 할 생각 밖에는 없다.
오늘날의 내가 있다는 것은 나에게 항상 물을 주셨던 부모님이 계시기 때문이다
꽃을 키우는 사람은 정성으로 물을 자주 주었을 것이고 정성이 부족한 사람은 꽃이 시들게
방치 했을 것이다. 그러나 정성이 많으신 분은 시들어가는 꽃마저 영양제를 주어서
꽃이 활짝 피게 하신다. 매일같이 주먹질하고 싸움했던 나를 사고만 저지르는 나를 부모님께서는 이렇게 멋진 호박꽃으로 만들어 주셨다. 하루도 마음 편하게 해드리지 못하고 마음만 아프게 했던 나를 잘 키워 주셔서 너무 감사해요. 예수님께서는 저에게 이렇게 훌륭하신 부모님을 만나게 해주셔서 너무 감사드립니다. 이 영광을 모두 예수님께 드리겠어요. 부모님들께서는 자주 너는 소 등에다 계란을 얹어 놓은 것 같다. 어린 아이를 물가에 내 놓은 것 같다. 꼭 시한폭탄 같다고 말씀 하신다.
이제야 나는 내가 그동안 부모님께 불효를 했고 나 때문에 많은 걱정과 근심으로 지냈고
나의 건강을 위해서 각별히 신경을 쓰시는 줄 알게 되었다. 고래 심줄 같은 아버님의 고집도
교회를 어머니와 함께 나가게 되었고 기도를 하게 되었다. 얼마전 어머니는 고향인 포항에 이틀을 간격으로 계속 다녀오셨다 포항에 다녀오신 뒤 피곤하실 텐데 헬스클럽 까지 가셔서 운동을 하셨다
어머니는 운동을 하신 뒤 너무 말씀을 어눌하게 하셔서 나는 누님에게 전화를 했다.
누님은 의대 출신이기 때문에 금방 알 수 있었다. 말이 어눌해지면 신경과 바로 직결되기 때문에 중풍의 전조 현상이라고 말씀하셔서 처음에는 의정부의 성모병원을 가려고 했으나 누님이 전화를 7번까지 하셔서 아버지께서 어머님과 함께 아산병원으로 가셨다 저녁 시간이었다. 나는 잠이 오지가 않았고 계속 안절부절 하고 불안하고 초조하기 까지 했다. 문 눈으로 밤을 보냈다. 나는 지난날의 잘못을 예수님께 “용서해 주세요 제발 어머니의 건강에 아무 이상이 없도록 해주세요 라고 눈물을 흘리면서 기도를 한 것은 이번이 처음 이었다.
예수님은 나의 기도를 들어주셨다. 아침 7시 25분에 아버지를 통해서 예수님은 응답하셨다.
어머님이 피로가 누적되셨고 경미한 것이라고 말씀 하셨다. 나는 부모님들의 마음이 그동안 얼마나 많은 수고와 고생하셨는지 알 수 있었다. 나도 상황이 안 좋으니 불안하고 초조하고 안절부절 하고 어머니의 건강 때문에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부모님께서는 못생긴 호박꽃인 나를 키우기 위해서 너무 많이 희생과 노력을 하셨다.
나의 건강 때문에 많은 신경을 쓰셨는지를 조금은 알 수 있었다
부모님께서는 누님이 저112의 부모님이라고 입버릇처럼 말씀 하셨다. 수술 후에 누님의 큰 은혜를 받고 지내왔음도 알 수 있었다. 시집살이를 하면서조차 두 명을 키우면서 학교에서 교펀을 잡고 있는 중에도 언제나 탈진상태 일 텐데 나를 위해서 누님은 새벽기도를 나갔었다고 동생에게 들었다. 병원에 있으면서도 카이스트까지 가서MRI를 강중구 교수님의 특별한 배려로 찍었고 병원 에서도 여러번 MRI를 찍었고 MRI 보다 더 비싼 패트를 조형제를 맞고 찍었고 핵의학검사와 여러가지 검사를 해서검사비만 300만원 나왔다 몸은 병원에 있었지만 마음은 항상 병원비 때문에 걱정이 태산 같았다 누님은 병원에 수술 받은 나를 위해서 올 때마다
손을 잡고 기도를 해주셨고 집에 갈 때에도 손을 잡고 기도를 해주셨다 누님은 여러해
동안 저축한 적금 도 나를 위해서 1300 만원 이나 병원비를 내주셨다 나는 굳은 결심을
했다 여태 까지 는 부모님께 불효 만 했지만 앞으로는 부모님의 기대에 어긋나지 말고 효도 만하고 살아야 겠다고 생각했다 다시 힘겹게 찾은 건강이니나는 하나님의 도구로 쓰임 받고 싶다
특히 성경을 읽으면서 저의 발작이 현저히 줄어 든 것을 보면서 주님은 정말 살아 계시다는 확신이들엇습니다 성경책 읽는 것이 얼마나 감사한 일 인지 또한 깨 달 았습니다 그리고 아침마다 저에게 전화로 성경책 읽고 느낀점을 나누시는 장로님께 감사 드립니다
나의 간질병이 100퍼센트 완치 된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하나님 께서 나의 병을 완전히 고쳐 주실 때 까지 끊임 없이 기도 하겠습니다


하나님의 아들로 거듭난 삶
송태일
2022.1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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