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용신의 그대와 여는 아침

음악FM 매일 07:00-09:00
0318화 우리를 기다려주는 빈잔의 넓은 마음처럼
그대아침
2025.03.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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잔의 일생은 기다림이다. 제 속을 내어놓고 채우거나 비우는 연속의 삶이다.
넘치는 것은 내 것이 아니기에 제 몫 이상을 탐하지 않는다.
비워지면 기다리면 될 일이다. 담기는 것에 우선하는 단호함은 잔의 낮은 자세다. 
차를 마시거나 술을 마실 때 불편하거나 어색하지 않은 한 특별한 존재감이 없는 이유다.
길 건너 후박나무 그늘 짙은 레스토랑 창가,
테이블 위에 네 개의 잔이 묵언수행(默言修行) 중이다.
한 공간에 있지만 각기 다른 표정으로 손님 맞을 꿈을 꾸는 걸까.
눈여겨보아 주지 않는 뒷모습도 보아달라는 듯 엎드려,
손길 닿을 한 사람을 기다린다.
그 진득한 기다림의 끝에는 누군가에 의해 세워져 채워질 거라는 믿음이 있기 때문이다.

4년 전이었던가. 파리 근교의 작은 공원이 있는 마을에서 봄을 맞은 적이 있었다.
카페는 소담스러웠다. 테이블 대여섯 개가 전부인 작고 아늑한 그곳에는
쿠키 굽는 냄새와 은은한 차향으로 가득했다.
나는 표면에 사선이 깊게 파인 옅은 블루색의 손잡이 없는 잔에 눈을 맞추고 차를 마셨다.
그럴 때면 받쳐 든 두 손의 미세한 떨림 같은 반짝임이 블루의 은은함과 어우러져
로맨틱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선택받아 내 앞에 놓인 잔에 온기 어린 입맞춤을 하고,
나직이 속삭이는 은밀한 사랑놀음 같은 그 특별한 경험은 충분히 이색적이었다. 

잔은 독립적이지 않다. 어울림을 좋아해 한 공간을 소비하기도 창조하기도 한다.
담기는 것이 무엇이든 개의치 않는다. 그저 제 속의 것을 품고 함께 어우러질 뿐이다.
떨리는 입술, 마른 입술에 위로라는 친구가 되기도, 슬픔도, 한숨도 받아주는 곁이 되어 주기도 한다.
잔의 존재 이유다. 기다림의 시대이다.
누구에게나 그 어떤 순간은 분명 존재한다.
간절함은 기회를 부르고 원하는 것이 때와 일치할 때 어떤 빛이 발광하는 순간은 온다. 
비워진 뒤에도 남겨진 공간을 채우고 또 다른 만남을 기다리는 잔의 
소박하지만 위대한 미학. 기다려야 굳는 관계가 있고 기다려야 오는 게 있듯, 
기다림이 사람의 기본이고 바탕인 사회다.
우리는 기다려야 마땅한 것들의 가치와 의미를 잔에서 배운다.

*윤혜주의 <못찾춘마디>에서 따온 글.
줄인 내용이 많습니다. 원문으로 확인해 주시고
개인SNS등에 그대로 옮겨가지 말아주세요~